공연하면 사람 몰려 … 예술은 지역소멸 막는 '노아의 방주'

2024-12-25 HaiPress

조국원 소백산예술촌장 인터뷰


인구 10만 안팎 경북 영주서


예술가 위한 창작공간 운영


한국문화예술위 지원 받아


다양한 축제무대도 마련해


"지역과 소통하는 예술인이


살기좋은 문화 만든다 확신"

극단 미추가 영주 소백산예술촌에서 지난 21일 개최한 '유유자적 전통놀음'의 한 장면.

천년고찰 부석사로 유명한 경북 영주엔 또 하나의 '보물'이 있다. 바로 연극 연출가 고(故) 조재현 선생이 일군 소백산예술촌이다. 폐교한 초등학교를 임대해 만든 예술공간인데 이곳은 국내 저명한 예술가의 작업실로 사용되거나 지역 예술가의 창작 공간으로 활용됐다. 2019년 조 선생이 하늘로 떠났지만 이곳의 명맥은 흔들림 없이 유지 중이다. 고인의 아들인 조국원 대표(사진)가 부친 유지를 이어받아서다.


24일 조 대표와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아버지께서 운동장 잡초를 뽑으며 일군 창작 캠프입니다. 지역민들과 조금 더 가깝게,또 일상 속에서 예술을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이에요."


1993년생 조 대표는 2019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대를 이어 연극을 전공 중이던 4학년 마지막 학기였는데 "아버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급히 소백산예술촌으로 내려왔는데,3개월도 지나지 않아 부친 임종을 겪었다. "언젠가 고향 영주에 가게 되겠구나" 했던 스물여섯 청년의 예감은 너무 일찍 현실이 됐다. "소백산예술촌의 작은 방에서 먹고 자면서 예술촌을 찾으시는 예술가분들을 만났어요. 이곳이 휴식과 소통의 공간이란 걸 알게 된 뒤로 예술촌의 존속을 위해 발로,심장으로 뛰었습니다."


대학로 공연을 강진의 지역색을 담아 각색한 '강진 홈쑈핑 주식회사 in 강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소백산예술촌은 2001년 폐교한 부석북부초교 자리에 세워진 복합예술공간이다. 20년 세월 축적한 프로젝트가 다양해 열거가 어려울 지경인데 '낭만주의 페스티벌' '부석에 예술꽃이 피었습니다' 등이 대표적이다. 올가을 개최한 '낭만주의 페스티벌'은 청년 예술가 40명이 2박3일간 모여 미술,영상,무용,연극,아크로바틱,귀금속 세공 등을 융합해 '원 팀'이 되는 프로젝트였다. 천년고찰 부석사가 보이는 이곳에서 청년들은 '하나'가 됐다.


지역민들과의 호흡도 이어졌다. '부석에 예술꽃이 피었습니다'는 70세 이상 할머니 합창단을 구성하는 프로젝트였다. '달빛별빛 공연이야기' '사과꽃 따기 체험' '여름 가족캠프' '부석사 화엄 축제' 등도 소백산예술촌이 거점이 되어 이뤄진 대표 콘텐츠였다.


조 대표가 이곳에 온 지 5년째,올해 만 31세인 그와 함께하는 직원은 8명으로 늘었다. 그의 기억 속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모닥불 앞에서 쓴 편지를 1년 뒤 발송해 드리는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3대 대가족이 오셨는데,1년 뒤 편지를 보내드리니 편지를 쓰셨던 할아버지께서 그 사이 돌아가신 거예요. 자녀분들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편지를 뒤늦게 받아본 거죠. 예술촌 중심으로 수많은 '스토리'가 만들어짐에 늘 감사드립니다."


영주시는 인구 10만 안팎의 소도시다.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수많은 지역 도시의 운명에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조 대표는 "예술이 소멸을 막는 하나의 방주가 되어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영주 출신 예술가분들,그리고 다른 지역의 예술가분들까지도 예술촌에서 좋은 기억을 쌓고 가시면 그 이후엔 부르지 않아도 알아서 오시곤 해요. 자연 속에서 휴식하고 다른 예술가와 소통할 수 있다는 걸 아니까 관계 인구는 계속 늘어납니다. 문화는 궁극적으로 그런 무형의 힘을 갖고 있어요. 그 힘의 근원인 예술의 근육을 잘 키우는 게 제 역할이기도 하고요."



영주를 비롯해 고성,태백,강화,강진,울릉은 올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소멸 위기 대응 문화적 지역 활성화 사업' 대상으로 선정됐다. '청년 정주 여건'에 관한 한 조사에서 영주의 경우 문화·여가 여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56.5점으로 일자리 여건(50.3점)보다 더 높았다. 인구 소멸이 심각한 전국 80개 넘는 도시가 죄다 이런 상황이다. 조 대표는 이어 말한다.


"접할 기회가 적을 뿐이지,지역민들이 이곳에 오시면 '문화 화학작용'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 즐거움을 바탕으로 지역에서 계속 살기 좋은 분위기,그런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일조하고 싶어요."


조 대표를 중심으로 구성된 소백산예술촌은 최근 용지를 소유했던 마을법인이 매각 결정을 내려 이사를 떠나야 할 상황에 처했다. '예술촌 2대 촌장'인 그에겐 두 번째 시련이었지만 놀랍게도 예술촌을 거친 지역민들,그리고 예술가들이 먼저 찾아와 손을 내밀었다. "용지를 저가에 빌려주겠다" "우리 창고에 넘치는 짐을 가져다놔라" 등 지인들 손길이 쏟아져,조 대표는 내년 3월 영주 시내로 소백산예술촌을 옮긴다. '왕복 1시간'이었던 지금 예술촌보다 접근성이 더 좋다.


"전화위복이죠. 전 예술촌이 '공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예술촌 핵심은 '사람'이었더라고요. 지역민들과 함께 예술을 펼치고 이로써 '머무를 수 있는 동기'를 선물하는 것,그게 제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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